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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학교법인 제115호] 가톨릭 교육의 멘토들 5 교회의 자유를 위해 싸운 인자한 스승 -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by 박승찬 posted Jan 0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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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 역사상 자주 온화한 성품과 뛰어난 학식을 통해 신자들을 교육시키고 내적으로 양성한 스승 들을 만나게 된다. 또한 외부의 억압에 대항해서 교회의 자유를 옹호했던 용감한 수호자들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습이 한 인물 안에서 구현된 적은 그리 흔하지 않다. 바로 이 드문 인물 중의 한 분이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034~1109)이다. 그가 가톨릭 정신에 기여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당시의 문화적· 학문적 상황부터 살펴보자.

중세 스콜라에서 벌어진 ‘성찬례 논쟁’


‘스콜라(Schola)’라고 불리는 중세 학교는 ‘7 자유 학예 (artes liberales)’를 주로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문법 학, 논리학, 수사학 3학과는 모든 학문의 기초를 이루었다. 중세 시대에는 문법학과 논리학을 합쳐서 종종 ‘변증론’이라 고 불렀는데, 카를 대제 이후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변증 론자’는 변증론이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했 고 신학도 변증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세력이 커질수록 반 대하는 쪽의 반응도 격 해졌다. ‘반(反)변증론자’ 는 “변증론이란 신학의 고유한 보물을 훔쳐 가 기 위해 ‘악마가 만들어 낸 발명품’이거나 기껏해 야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에 불과하 다.”고 폄하했다.

당시 논쟁의 열띤 분위기 를 느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샤르트르 주교좌성당 학교에 변증론 지식이 매우 뛰어 난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와 란프랑쿠스(Lanfrancus) 라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란프랑쿠스는 신을 명 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겠다며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했 다. 한편 베렌가리우스는 변증론 공부를 계속하여 최고의 명 성을 얻었고, 이를 신학에 적용하고 싶어 했다. 그가 택한 방 법은 성경의 수많은 구절을 일일이 해석하는 대신, 가톨릭 미 사 중의 핵심적인 문장, 예를 들어 “이것은 나의 몸이다(Hoc est enim corpus meum).”라는 성찬 기도문을 분석하는 것 이었다.

베렌가리우스는 기존의 다양한 해석에 만족하지 못 했고 끊임없이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 로 만족했던 이들은 베렌가리우스가 쏟아 내는 질문들이 듣 기 불편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뛰어난 변증론자인 베렌가리 우스를 논박하지는 못했다. 그때 수도사가 된 란프랑쿠스가 자신의 옛 친구를 비판하며 논쟁에 가담했다. 베렌가리우스가 변증론으로 신학을 좌지 우지하는 일을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란프랑쿠스는 성찬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변증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이용해 새롭게 설명했다.

둘 사이의 토론이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개입했다. 그들은 아직 제대로 토론의 결론이 나지도 않았는데 란프랑쿠스의 일방적인 승리를 선언해 버렸다. 물론 이성적인 열망이 강했던 사람들 은 이런 성급한 결론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변증론자들은 권위로 억누르려는 교회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 렇게 분열된 중세 사회에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준 이 가 바로 안셀무스이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강조한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1033년 이탈 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 유한 귀족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 가 사망한 후 유명한 학 교들에서 철저한 변증론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059년 노르망디 지방 의 베크에 있는 베네딕토 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 했다. 당시 베크 수도원 장은 성찬례 논쟁으로 명성을 얻은 란프랑쿠스였다. 안셀무 스는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더불어, 수도원 도서관에서 아 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를 포함한 다양한 학자들의 책을 섭렵했다. 1067년에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제자인 동 료 수사들을 위해 많은 작품을 썼고, 교육에 힘써서 베크 수 도원 학교를 유럽 최고의 학교로 발전시켰다.

바로 이 시기가 개인적으로는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기도와 묵상과 독서에 마음껏 몰두했던 그는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 온』, 『진리론』, 『자유의지론』 등의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 런데 안셀무스는 자신의 명성이나 필요에 따라 이 책들을 저 술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함에도 불 구하고 동료 수사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집필했던 것이다.

“몇몇 형제(수사)들이 이따금 나에게 하느님(신성)의 본질을 명상하는 것에 대해… 내가 그들과 일상적인 용어로 대화하 면서 강론했던 내용을 명상을 위한 모범적인 [사례의] 하나로 서 글로 남길 것을 매우 진지하게 청했다. […] 나는 이 일을 오랫동안 기피해 왔고, 이 과업과 내 자신의 능력을 비교하면서 여러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싶어 했다. […] 그러나 마침내 나는 겸손하면서도 집요하게 조르는 그들의 청원과 비난할 수 없는 진지한 열성에 지고 말았다. […] 그들에 대한 사랑 때 문에,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이 정해준 대로 작업을 했다”(『모놀로기온』 서론).



“안셀무스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그들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인내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강압과 벌로 규정되는 교육을 날카롭고 단호하게 비판했다. 엄격함과 체벌만으로 청원기의 청소년들을 다스리던 다른 수도원장과 나눈 대화는 안셀무스의 교육 이념을 잘 표현한다.”

이런 제자들에 대한 애정은 안셀무스가 인자한 스승으로서 항상 제자들의 윤리적·종교적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에 서도 드러난다. 그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그들의 감 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인내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강압과 벌로 규정되는 교육을 날카롭고 단호하게 비판했다. 엄격함과 체벌만으로 청원기의 청소년들을 다스리던 다른 수도원장과 나눈 대화는 안셀무스의 교육 이념을 잘 표현한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에 따라서 교회는 자유로워야 하며, 오직 하느님 계명의 지배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교회의 자유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은 없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신부가 자유롭기를 바라시지 하녀이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당신께서 한 작은 묘목을 정원에 심어 놓고, 가지가 전혀 뻗어 나가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 놓았다가 몇 년 후에 풀어 준다면 이 나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확실히 전혀 쓸모없이 비틀리고 가지들이 얽힌 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몹쓸 나무가 생긴 것은 부당하게 묶어 놓았던 당신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교회의 정원에 심겨진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억압 속에 자라난 청소년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강한 반발로 미움과 악의 길로 빠져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잘 조화될 경우 제자는 스승에 대해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과 자유를 자각할 수 있다. 그 자신도 이런 애덕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제자들과 평생 동안 유지했다. 1078년 안셀무스가 베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수많은 청년들이 그 수도원에 몰려들었다. 이미 그의 박학함과 성덕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는 그 많은 청원자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곳곳에 베크 수도원의 모범을 따라 곳곳에 자(子)수도원을 건설했다. 그는 영국에도 여러 개의 자수도원을 건립했고, 이를 돌보기 위해 종종 영국도 방문했다. 이를 통해서 그의 명성은 노르망디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퍼져 나갔다. 따라서 란프랑쿠스가 죽은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가 안셀무스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했던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안셀무스는 세속적인 명성이나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노쇠함을 이유로 이 중책을 강하게 거절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주위의 간곡한 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093년 수락하게 된다. 그런데 안셀무스는 이 주교직을 맡음으로써 고통스러운 분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왕의 최고 대신이라는 권력도 지녔다. 왕은 그를 통해서 주교들을 임명하는 등 자기 왕국의 교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욱이 캔터베리 대주교는 교황의 서신을 받거나 교류하기 위해 영국 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안셀무스 대주교는 교회 직무에 대한 이런 간섭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에 따라서 교회는 자유로워야 하며, 오직 하느님 계명의 지배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교회의 자유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은 없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신부가 자유롭기를 바라시지 하녀이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왕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안셀무스는 당시 영국 내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던 교황의 권위를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주교 착좌식에서 교회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서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팔리움을 왕에게 받는 관례를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걸쳤다. 또한 그는 세속화된 성직 계층을 개혁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권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한 대다수의 다른 주교들은 안셀무스의 이런 노력을 배척했다.


안셀무스는 교회 내외에서 심각한 곤경에 빠졌다. 결국 그는 1097년 영국을 떠나서 유럽 대륙으로 첫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망명 중에도 그를 존경하던 다른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다양한 과제를 맡았다. 더욱이 그리스도론에서 오랫동안 권위 있는 저술로 인정되었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도 이 망명 기간 중에 저술된 것이었다. 영국 왕 윌리엄 2세가 사망한 후 안셀무스는 1100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왕 헨리 1세가 강요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다.

결국 안셀무스는 1103년부터 1106년까지 또다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교황의 중재로 돌아온 안셀무스는 계속해서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성직자들의 생활을 수도원의 삶에 기초를 둔 ‘종교적인 삶’의 방향으로 혁신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안셀무스는 만년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1109년 성주간 수요일에 사망할 때까지 죄악과 은총, 자유의지와 예지 같은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사색과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안셀무스가 세운 스콜라 철학의 목표:
‘신앙과 이성의 조화’


이렇게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안셀무스는 무엇보다도 그가 개발한 학문적 방법과 목표를 통해 수세기 동안 스콜라철학과 신학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자신보다 앞선 모든 교회 학자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더 큰 관심을 쏟았고, 이것을 이용해서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저서 『프로슬로기온』의 본래 제목,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은 전체 스콜라철학과 신학을 이끄는 좌우명이 되었다. 그는 믿음의 내용을 이성으로만 설명하려는 변증론자와 신앙에 대한 이성의 개입을 완전히 거부하는 반변증론자 모두를 비판했다.

그에게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었기 때문이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목표에 따라 안셀무스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신앙 진리들에 접근해서, 이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문적인 엄격성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안셀무스의 저술 뒤에는 “지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통찰이 숨어 있다. 그에 의하면 사랑하면 할수록 알고 싶은 열망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점점 더 그 아는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그런 형태의 지식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안셀무스는 겸손하게 고백한다. “더욱이 저는 당신을 뵈옵도록 창조되었지만, 저는 그것 때문에 자기가 창조된 것을 아직도 하지 못했습니다”(『프로슬로기온』, 제1장).

이와 같이 안셀무스의 뛰어난 학문적 성과나 단호한 정치적인 투신의 배경에는 창조주가 제시한 질서가 하나라는 확신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즉 창조의 질서와 계시의 질서가 서로 구분될지라도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나의 “빛나는 질서”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학문적인 탐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이 파악한 교회는 정치와 세속 사회의 간섭과 침해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었다.

“안셀무스의 뛰어난 학문적 성과나 단호한 정치적인 투신의 배경에는 창조주가 제시한 질서가 하나라는 확신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즉 창조의 질서와 계시의 질서가 서로 구분될지라도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나의 “빛나는 질서”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가톨릭 교육자들에게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투신에 대한 열정만이 앞서는 활동가들에게는 근본적인 진리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또한 실제의 삶과 사회의 어려움에 무관심한 학자들에게는 상아탑 안에서 안주하거나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경향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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