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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의 삶을 유린해도 좋은가?

by 박승찬 posted Jan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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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01-05 19:27수정 :2017-01-05 20:01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17) 윌리엄 오컴

1349년 투르네의 흑사병, 질 르 뮈지(1272~1352),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1349년 투르네의 흑사병, 질 르 뮈지(1272~1352),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국가가 생기는 것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은 영화 <변호인>의 명대사로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영화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처럼 1975년 11월 중정이 발표한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부림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이들이 2016년 12월 무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유죄 선고 후 41년 만이다. 이 사건 조작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 국정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자신이 한 일을 국가를 위한 직무수행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의 삶을 철저히 유린하는 일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중세 후기에도 소위 ‘보편적 가치’를 지킨다고 자처하는 이들의 폭력성에 학문적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란 문구로 유명한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 1285?~1349)이다.

 

윌리엄 오컴,영국 서리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윌리엄 오컴,영국 서리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스콜라 철학 체계 비판: 신앙과 이성의 분리

 

윌리엄 오컴은 프란치스코회 회원이며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다. 그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완성된 스콜라철학이라는 사상체계를 맹렬히 비판했다. 스콜라철학의 목표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였는데, 오컴은 소중한 신앙이 자칫 어설픈 이성적 설명으로 인해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스콜라철학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가 이성이 개입해서는 안 될 영역을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신앙과 이성을 극단적으로 분리하여 이성이 신앙의 성소(聖所)에 뛰어드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이성은 유효하게 인식이나 논증을 할 수 있는 영역, 즉 경험의 영역으로 사용이 제한되었다. 이런 경향에 따라 오컴은 신의 존재나 속성에 관한 것을 계시된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신학적인 내용과 연관된 과거의 철학적인 논증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주된 비판은 소위 ‘경제성 원리’에 따랐다. 보다 적은 것으로도 충분한 경우에는 보다 많은 존재나 원인을 요청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였다.

 

보편적 가치 수호 자처하는 자들
폭력성에 학문적으로 반기 들어

 

‘가장 중요한 건 개별적 개체다’
오컴주의자들 ‘근대파’ 적극 형성

 

국가와 자유 등 ‘보편적 가치’ 
말의 의미 진지하게 성찰해야

 

오컴은 이미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의할 때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교수 자격을 받기 전인 1324년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이론이라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결국 이단 혐의로 아비뇽 교황청에 소환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젊은 나이에 교수로서의 길을 마감했다. 체계적인 논리학 저서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해>, 미완성인 <명제집 주해>를 포함해 거의 모든 철학적?신학적 주요 작품들은 교황청에 소환되기 이전에 저술된 것이다.

 

그는 나중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오컴은 정열적으로 왕과 교황 사이의 정치적인 논쟁에 참여했고, 왕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은 검으로 나를 보호하시오. 나는 당신을 펜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1347년 루트비히가 사망한 후, 오컴은 교황청과의 화해를 모색하며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뮌헨에서 페스트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사회의 위기를 맞아 부활한 유명론

 

오컴의 목숨마저 빼앗아 간 페스트 때문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페스트를 비롯해서 추운 날씨에 따른 기근, 계속되는 전쟁 등의 이 대재앙은 종교에 대한 관심을 극도로 끌어 올렸다. 죄의식은 팽배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채찍질 고행 등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튼튼한 아비뇽 궁 안에서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려던 고위 성직자들은 다양한 재앙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신자들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자, 사람들은 교회가 약속해 온 인류 구원과 영생에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허하고 보편적인 이상보다도 개인의 생명과 현세적 삶이 훨씬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콜라 철학 초기에 해결되었던 보편논쟁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12세기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적 이념이 중요하다는 보편실재론과, 개별적 개체가 중요하다는 유명론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고자 온건실재론을 제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온건실재론을 받아들이면서 보편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페스트 때문에 극단적인 위기가 닥쳐오자 유명론자들의 주장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들이다! 하나하나 개체들의 생명만이 소중하지, 과거 스콜라 철학자들이 만들었던 거대한 체계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가, 우리의 처참한 현실이?”

 

이런 비판에 동조하며 오컴은 보편적 실재를 면도날로 잘라내듯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개체들’이 진리를 보장하는 척도가 되었고, 보편에 대해 우위를 차지했다. 오컴이 볼 때는 사물에 대한 직관적 지식이 추상적 지식보다 우월했다. 더 나아가 오컴은 자신의 유명론에 따라 치밀한 논리학 체계를 새롭게 구성했다. 이를 토대로 신학과 철학에서 전수된 문장들을 철저하게 언어적으로 분석했다. 이 문장들은 새로운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 오컴 수사”, <논리학 대전> 곤빌 앤 카유스 칼리지 수사본, 1330년경, 캠브리지.

“이 오컴 수사”, <논리학 대전> 곤빌 앤 카유스 칼리지 수사본, 1330년경, 캠브리지.

 

오컴철학의 빛과 그림자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과학에도 영향을 미쳐 과학 탐구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옥스퍼드대학은 오컴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의 지지자인 오컴주의자들은 소위 ‘근대파’(moderni)를 형성하고, 전통적 실재론을 따르는 ‘고대파’(antiqui)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신학, 철학, 자연과학을 망라하여 여러 학파들은 극단적으로 대립했고, 실재에 대한 궁극적인 탐구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다듬는 데에만 치중했다. 파리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은 논쟁과 혼란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신비주의와 유사하게 오컴은 윤리적인 선을 오직 행위자의 ‘의도’에서 찾았다. 오컴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했다. 신이 모든 피조물을 자유로이 창조했기 때문에, 피조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에 대한 관념은 신이 폭군처럼 느껴질 위험을 안고 있었다. “왜 선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가”와 같은 의문조차 신이 절대적인 자유로 결정했다라고 답하면 그만인 셈이다. 이에 따라 “신이 결정한 것, 그것이 곧 선이다”라는 주장과 같은 반이성주의 경향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오컴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켰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새롭게 자유를 얻은 이성쪽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14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신앙과 지식 사이의 불화가 점점 커갔다. 중세에 들어서며 다양한 방식으로 조화를 찾던 신앙과 이성은 이제 갈라져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윌리엄 오컴의 <논리학 대전>, 1508년 베네치아 출간, 바이에른 국립도서관.

윌리엄 오컴의 <논리학 대전>, 1508년 베네치아 출간, 바이에른 국립도서관.

 

물론 유명론자들이 아무리 개인의 권한만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가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이나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추앙받아 왔다. 우리는 실제로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아 갈 수도 없다. 또한 국가의 몰락은 아무 잘못이 없는 개별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준다.

 

문제는 소중한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허용한 권한과 권력을 몇몇 개인이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탐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발생한다. 이런 태도는 중세가 끝나고 근대에 발흥한 절대 왕정의 왕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물며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시대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럼에도 국민의 권한을 이양받은 정치인들과 검사들은 종종 국민을 현혹시키고 정당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 보편적인 가치를 남용해 왔다. 어떠한 개인도 보편적 가치에 부여된 권력을 사유화해서는 안 된다. 오컴은 국가와 자유 등 보편적 가치를 외치는 모든 이에게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라고 요구한다. 통치자의 말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국민들이 그가 약속한 정책의 결실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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