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21) 가톨릭 철학의 흐름과 동향 5 : ‘신앙의 빛’ 속에서 가톨릭 철학이 나아갈 방향
가톨릭 근본정신 탐구하며 현대 사상과의 소통 이뤄야
현 상황으로부터의 계속적인 재조명 노력 필요
‘계시된 진리’·‘다양한 사상 속 보화들’간 조화를
발행일 : 2013-08-25 [제2859호, 8면]

현대 가톨릭 철학의 흐름에 대해 성찰하는 이번 원고를 작성하는 동안 새 교황 프란치스코의 첫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이 지난 7월 5일 반포되었다. 이 회칙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필자는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온 내용과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신앙의 빛」은 복음의 메시지와 고대 철학과의 만남에서 시작된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현대까지 이르는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음을 강조하고 있다(3·4·24·32항).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시각도 우리가 성찰해 온 바와 매우 유사하다. 현대인은 근대 이후의 전체주의적인 사상들이 사용했던 ‘진리 자체’와 같은 표현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모든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질문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25항). 더욱이 이렇게 보편적인 진리가 고집스러운 전체주의의 강요처럼 느껴질 때면, 이것은 윤리적으로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극적인 행복을 쉽게 포기하고 현세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폐쇄성에 갇혀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34항). 또한 새 회칙은 현대문화 안에서 우리의 생활을 더욱 쉽고 편안하게 해주는 과학기술의 진리만이 유일하게 인정되는 진리라고 보는 입장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25항). 필자는 새 회칙을 통해 「신앙과 이성」에서 표현된 우려와 염려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의 위기에 직면하여 가톨릭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현대 가톨릭 철학의 멘토, 토마스 아퀴나스

회칙 「신앙과 이성」의 후반부에서는 명시적으로, 왜 가톨릭교회의 교도권이 반복해서 토마스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는지를 밝힌다.

“실상 그(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찰 속에서 이성의 요구들과 신앙의 힘이, 일찍이 인간 사고에 의해서 이룩된 가장 고상한 종합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에게 고유한 모험을 평가 절하함이 없이 계시를 통해서 도입된 근본적인 새로움을 옹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78항).

그렇다면 도대체 위대한 멘토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현대 가톨릭 철학이 배울 수 있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 ‘가톨릭교회 최고의 스승’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의 견해를 경청했던 신학자였다.


다른 사상과 학문에 대한 개방성

위대한 성과를 거둔 토마스를 존경하기 위해서 붙여졌던 ‘영원의 철학’, ‘가톨릭교회 최고의 스승’ 등의 명칭은 토마스가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진보적’인 사상가였는가를 잊어버리게 만들기 쉽다. 오히려 사람들은 신토미즘적인 학문경향에 따라 토마스가 매우 보수적인 학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토마스가 당대의 학자들이 의심하면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해 과감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매우 개방적인 사상가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토마스야말로 “신앙인은 건방지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는 겸손으로 이끈다”(「신앙의 빛」 34항)는 사실을 자신의 전 생애를 거쳐서 보여준 학자였다. 토마스는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 토론 중에 항상 평온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상대방의 견해를 경청했다. 이런 자세는 심지어 그와 다른 의견을 가졌던 토론자들에게서도 찬탄과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이러한 토마스의 개방성과 겸손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의 다양한 사상과의 관계정립을 위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만일 토마스의 정신에 진정으로 충실한 학자들이라면 근대 이후의 변화와 현대의 다양한 사상들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논쟁적인 일방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회의, 거리낌, 심지어 적개심 등을 지니고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안에서도 참신한 지적 조명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다가가도 좋을 것이다.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항구적인 자세

다른 학문과 견해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정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의 편협함과 대조되는 뚜렷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참신하고 당대에 영향이 컸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이 전체적으로 진리와 일치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는 세계의 영원성과 능동지성의 분리 등에 대한 입장에 관해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일치하기 힘든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명백히 거부했다.

이러한 토마스의 태도에서 우리는 타 학문과의 대화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그 첫번째 위험은 ‘절충주의’(eclecticismus)로서, 이는 서로 다른 체계나 역사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나 주장들을 무비판적으로 종합하는 태도이다. 단순히 여러 사상을 나열해 놓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들이 담고 있는 모순과 긴장감을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 다른 위험은 어떤 철학의 진리성이, 그것이 특정 역사적 시기에 적합한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역사주의’(historicismus)이다. 물론 그 자체로 영원불변한 진리라도 그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어야 하며, 이러한 역할이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도 현대적인 문제에 답해야 하는 신학자와 철학자의 사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과 역사주의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사상 체계가 어떤 식으로든 시간과 문화에 매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하는 진리 또는 오류는 시공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불변하게 그러한 것으로 규정되고 평가될 수 있다”(「신앙과 이성」 87항)

요약하자면, 「신앙과 이성」은 토마스를 그렇게 격찬함으로써 ‘다른 학문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과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항구한 자세’라는 두 가지 과제를 우리 시대의 철학과 신학에 요청하고 있다.

현대 가톨릭 철학이 추구해야 할 ‘신앙과 이성의 조화’

형이상학적인 지평을 열어 놓는 ‘존재의 철학’

회칙 「신앙과 이성」은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롭고 창조적인 관계를 위해 요구되는 가톨릭 철학의 과제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우선 가톨릭 철학은 현대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서 인간 이성의 “진리 인식 능력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82항), 허무주의와 과학주의를 넘어설 수 있도록 “삶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그 지혜적 차원을 회복”(81항)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형이상학(vera metaphysica)적 차원의 철학, 곧 그 진리 탐구에서 절대적이고 궁극적이며 정초적인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경험적 소여들을 초월할 수 있는 철학(83항)”을 복원해야 한다.

이러한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전형이 바로 “모든 한계를 넘어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분께 인도하는 존재 현실력(actus essendi)”(97항)을 발견해낸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의 철학”를 통해서 제시된 바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가톨릭 철학자들은 단순히 토마스가 제시한 결론과 표현을 답습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근대주의의 위협이 매우 심각했던 시대에 나온 「영원하신 아버지」(1879년)와는 달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방적인 정신을 경험한 후 발표된 「신앙과 이성」이 요구하는 ‘형이상학’이나 ‘존재의 철학’은 어떤 특정 역사적 철학 사조 또는 학파의 의미로 해석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회칙에 따르면 “토미즘과 신토미즘의 부흥이 그리스도교적 영감을 받은 문화 속에서의 철학적 사고의 부흥의 유일한 표지는 (아니며)”, 그밖에도 많은 가톨릭 철학자들이 “신앙과 이성을 결합시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사상 전통들을 생생하게 보존하고자 노력”(59항) 해왔다. 따라서 현대 가톨릭 철학은 “낡은 형식의 무익한 반복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면서, 최근에까지 이르는 철학 전통 전체의 요구들과 통찰들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존재의 문제를 새롭게 제시할 수 있어야”(97항) 한다.

풍부한 인격개념에 근거한 진정한 지혜

또한 새로운 ‘존재의 철학’은 그리스도교적 형이상학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현대의 다양한 철학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역동적으로 포괄함으로써 “인간의 영적 본성에 바탕을 두고 인격적 존엄성의 근거를 확립할 수 있게 해”(97항) 주어야 한다. 실제로 토마스는 현대의 인격 개념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인격의 개별성, 대체불가능성, 전체성, 관계성, 자기 초월성 등을 포괄하는 놀라우리만큼 풍부한 인격 개념을 선사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합일, 영혼의 불멸성과 육체의 부활을 조화시킬 수 있는 설명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궁극 목적과 도덕적 원리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를 마련해 주었다. 토마스가 제공한 풍부한 선물을 현대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들에 적용하는 것은 바로 현대 가톨릭 철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히 토마스가 주장했던 명제들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것보다 그가 보여 주었던 진리 탐구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을 마음에 품고, “언제까지나 타당한 철학 전통의 흐름 속에서 형이상학적 지혜를 포함하여 철학적 탐구에 고유한 진정한 지혜와 진리의 차원들을 복원시킬 용기를 가져야”(「신앙과 이성」 106항) 한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에 대한 역동적인 추구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로마 문화와의 만남 이후 세상과 소통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 기존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전시키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가톨릭의 오랜 전통 안에 담겨 있는 핵심적인 근본정신을 깊이 탐구하는 한편, 이를 끊임없이 현대적 상황으로부터 재조명하며 현대의 사상들과 다양하게 소통해야 한다. 각 대화상대자의 오류들을 분명하게 지적하면서도 그들이 지닌 진리의 단편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겸손하고 개방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세는 현대 가톨릭 철학자에게 대화를 위한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계속 노력해 갈 때, 토마스가 영원한 지혜인 ‘계시된 진리’와 당대의 가장 뛰어난 이성의 진리를 담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훌륭하게 종합했듯이, 우리도 ‘계시’와 현대의 다양한 사상에 담겨 있는 ‘보화’들을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박승찬 교수는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중세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한국중세철학회 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박승찬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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