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화일반

“어둠이 빛 이긴 적 없다” 권력 횡포 속 커지는 희망

등록 :2016-05-12 20:07수정 :2016-05-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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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는 네로 황제. 폴란드 화가 헨리크 헥토르 시에미라즈키(1843~1902)의 그림. 1877년 제작.
기독교도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는 네로 황제. 폴란드 화가 헨리크 헥토르 시에미라즈키(1843~1902)의 그림. 1877년 제작.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1) 그리스-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국가 권력이 힘없는 국민을 유린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종종 벌어진다. 중세의 오랜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에 익숙한 필자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대 사회에서 다시 반복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행된 국가 권력의 횡포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에서 태동했다. 그 첫 만남은 로마 제국이 식민지의 신흥 종교 집단을 유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신흥 종교 집단의 지도자(나자렛 사람 예수)를 처형한 일은 논외로 하더라도, 로마 제국은 갓 생겨난 그리스도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박해의 발단이 된 사건은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였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로마인들의 분노는 당시 황제였던 네로에게 향했다. 네로 황제가 소방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로마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매우 교활하고 무자비한 폭군이었다. 그는 군중들의 분노를 무력 진압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났음을 간파하고는 ‘속죄양’(Sndenbock)으로 그리스도교인을 택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 문화로부터 시작되었으면서도 종교적 이념의 차이 때문에 유대교인의 미움을 받던 신흥 종교 집단이었다. 네로가 그리스도교인들의 방화로 로마 대화재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군중들의 분노는 그리스도교로 향했다. 네로는 맹수와 검투사가 그리스도교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광경을 군중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분노에 찬 로마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표자 오리게네스.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예민하고 대담한 정신의 소유자 중 한 사람이었던 오리게네스는 20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기고 박해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표자 오리게네스.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예민하고 대담한 정신의 소유자 중 한 사람이었던 오리게네스는 20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기고 박해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편 그리스도교인들은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리스도교 의식인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는 행위가 ‘식인의 풍습’이란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관습은 ‘근친상간’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자들 사이에 통용되던 “형제, 자매”라는 호칭, 그리고 박해 중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시작된 그리스도교인들끼리의 결혼 등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로마제국 다신교 신앙과 충돌
속죄양으로 그리스도교 박해

“누구든 하느님 자녀” 가르침
억압받던 이들에게 울림 줘

로마 지식인 맹렬한 비난 속
오리게네스 신학 체계 수립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사상은 로마 제국의 체제와 충돌했다. 로마인들은 다신교를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식민지의 신들을 자신들이 공경할 신의 목록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일신 사상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는 로마인들이 강요하는 여러 신에 대한 숭배를 거부했다. 황제가 국가 종교의 수장을 겸한 로마 제국에서 볼 때, 이것은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위험한 태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권력과 사회의 억압에도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자유인이든 종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는 가르침은 당시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억압받던 이들에게 진정 ‘기쁜 소식’(福音)이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신앙을 지키며 보여준 의연함은 점차 로마 상류층 여성들을 감화시켰고, 그녀들의 영향을 받은 귀족 남성들 중에서도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가 늘어났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핵심층까지 파고들자, 켈수스, 포르피리오스 등 로마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이비 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로마 문명에 대해 자부심이 컸던 켈수스는 “그리스도는 사기꾼이자 마술사”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신화는 사도들이 날조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가 가난한 하층민들만 신자로 포섭한다며 경멸했다.

“이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자만이 하느님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들은 바보와 무식쟁이, 노예와 여자와 어린이들만을 유혹한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은 로마 지식인들의 비난에 위축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는 사회에서 억압받던 이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등 여전히 비권위적으로 행동했다. 또 한편에서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테르툴리아누스)라고 외치며 신앙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그리스도교인들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자신감만으로 로마 지식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교가 성장기에 접어들자, 선교에 성공하려면 지성적 차원의 비판에 대해서도 충분한 답변을 제시해야 했다. 이를 위해 로마인의 사상과 언어로 그리스도교를 설명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명을 떠맡은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거점은 알렉산드리아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철학 연구의 중심지로, 지중해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도 유명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표자 오리게네스(185?-254?)는 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그는 성인이 되자 순교한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장남 오리게네스까지 잃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의 옷을 숨겨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오리게네스는 어린 동생에 대한 책임을 자각했고, 자신의 열정을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이론적인 연구에 쏟았다. 지적으로 뛰어났던 오리게네스는 젊은 나이에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감동적인 강의와 저술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최고의 사상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처음에는 켈수스 등의 왜곡된 비난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켈수스의 비난이 계속되자, 마침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아직도 전혀 맛보지 못했거나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신앙이 약한 이들”(로마 14:1)을 위해 가장 강력한 반박서(<켈수스 반박>)를 작성했다.

켈수스는 성경의 모순들을 지적하며, “자기 제자에게 배신당해 붙잡힌 이를 어떻게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등의 질문을 퍼부었다. 오리게네스는 이에 답변하기 위해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가 유래한 경위를 시작으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영웅숭배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을 그리스 철학 용어로 설명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해서도 ‘영적인 해석’을 성경에 적용함으로써 입증했다. <원리론>에서 오리게네스가 보여준 영적 해석의 놀라운 창의성과 <헥사플라>(6중역본)에서 보여준 철저한 비판정신의 조화는 이후 모든 성경 해석의 귀감이 되었다.

오리게네스는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탐구했지만 최종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플라톤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철학 체계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정통파 신앙과 일치되지 않은 점을 주장했고, 그의 사후 오랫동안 지속될 논쟁의 씨앗을 뿌렸다. 그럼에도 오늘날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학문적 체계를 처음 수립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이론을 토대로 많은 제자들과 적대자들이 ‘진리’에 더욱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권력은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를 금세 없애버릴 것처럼 막강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열망을 품은 이들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극단적인 억압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고귀한 모습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대한 확신, 죽음보다 강한 희망, 실천 속에 드러난 놀라운 형제애는 국가 권력의 무자비한 박해 앞에서도 그리스도교를 지속시켜 주었다. 국가의 폭력과 보수적 귀족의 비난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오리게네스 같은 학자의 변론과 이론적 체계화가 반드시 필요했다.

오늘날에도 국가 권력이 진실을 알고자 하는 시민을 무력으로 억누르거나, 권력의 하수인이 된 언론을 이용하여 진실을 덮으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박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보여준 확신은 새로운 희망의 원천이 되지 않을까.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5)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순교자들의 희생을 딛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한 그리스도교는 이제 거대한 로마 제국 안에서 억압받는 이를 위한 종교로 남을지, 황제가 내미는 손을 잡을지 결정해야 했다. 그리스도교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다음 연재에서는 이에 대한 답변을 찾아본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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